세트와 작업한다는 것
붉은 사막은 사람을 봐주지 않는다
#1.
세트 이야기를 쓰고 나니, 자연스럽게 다음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졌습니다.
세트라는 신격을 단순히 “혼돈의 신”, “폭풍의 신”, “사막의 신” 정도로만 보면 놓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물론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세트는 고대 이집트 전승 안에서도 사막, 폭풍, 혼돈, 폭력성, 외부자,
이방의 영역과 연결되는 신격으로 자주 설명됩니다.
그런데 세트가 재미있는 지점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세트는 단순히 질서를 망가뜨리는 혼돈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전승 안에서는 질서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폭력성,
혼란을 다룰 수 있는 힘, 경계 바깥에서 밀고 들어오는 위협을 상대하는 존재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세트는 참 애매합니다.
무섭습니다.
거칠습니다.
다정한 신격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필요할 때는 가장 앞에서 싸우는 쪽이기도 합니다.
특히 라의 태양선과 아펩 이야기를 보면 이 이중성이 잘 드러납니다.
아펩은 태양신 라의 여정을 방해하는 거대한 혼돈의 뱀으로 등장합니다.
밤마다 라의 배를 위협하고, 우주의 질서인 마아트를 삼키려는 존재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이때 세트는 태양선의 앞쪽에 서서 아펩을 공격하는 존재로 나타납니다.
이게 참 세트답습니다.
혼돈의 신이면서,
혼돈에게 잡아먹히지 않게 하는 신.
질서 바깥의 신이면서,
질서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경계에서 싸우는 신.
그래서 저는 세트를 “혼돈 그 자체”라고만 보기보다는,
혼돈을 다루는 자에 가깝게 느낍니다.


#2.
세트는 다정하게 달래주는 타입은 아니었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하고 등을 토닥여주는 쪽이라기보다,
“그래서 너 지금 뭐 피하고 있는데?”
“네가 진짜 무서워하는 게 뭔데?”
“그렇게 계속 미루고 있을 거야?”
“터뜨릴 걸 왜 계속 안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정면에서 보게 만드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세트 작업을 하다 보면 가끔 정신머리가 글러먹었다는 회초리를 맞는 기분이 듭니다.
환장합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그게 또 보호였습니다.
세트의 보호는 부드러운 보호와는 조금 다릅니다.
포근한 담요를 덮어주는 느낌이라기보다, 사막 한가운데 던져놓고
“살아남아라.”
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낄낄...
#3.
처음에는 이게 너무 매정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몰아붙이지?
왜 이렇게 숨을 곳이 없지?
왜 자꾸 내가 피하고 있던 문제를 보게 만들지?
그런데 사막이라는 공간을 생각해보면 조금 이해가 됩니다.
사막은 사람을 봐주지 않습니다.
사막에는 숨을 곳이 많지 않습니다.
습기처럼 눅진하게 감정을 감싸주는 것도 없고, 숲처럼 복잡하게 시선을 가려주는 것도 없습니다.
그냥 드러납니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내가 어디서 무너지는지.
내가 무엇을 계속 회피하고 있었는지.
그래서 세트의 공간은 개인적으로 “정화”보다는 “벗겨짐”에 가까웠습니다.
#4.
정화가 씻겨나가는 느낌이라면,
세트의 사막은 불필요한 껍질이 말라붙고 갈라져서 떨어지는 느낌입니다.
아프고, 건조하고, 솔직히 별로 낭만적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중요한 일이 하나 일어납니다.
터뜨릴 걸 확실히 터뜨립니다.
세트는 눌러둔 것을 계속 눌러두게 만들지 않습니다.
썩은 감정, 미뤄둔 결정, 외면하던 문제, 질질 끌던 관계, 이미 답은 나왔는데 붙잡고 있던 것들.
그런 것들을 적당히 예쁘게 포장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압력을 올립니다.
더는 못 숨기게 만듭니다.
피하고 있던 것을 사막 한가운데로 끌고 나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그래서 이걸 계속 들고 갈 거야?”
이 지점이 세트 작업에서 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5.
세트는 무조건 부수는 신이 아닙니다.
하지만 터져야 할 것은 터지게 합니다.
오래 곪은 것은 결국 열어야 합니다.
안에서 썩고 있는 것을 계속 감싸고 있으면, 그건 보호가 아니라 방치가 됩니다.
세트의 방식은 부드럽지 않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 부드럽지 않음이 사람을 살립니다.
고대 이집트 전승에서도 세트는 부정적인 신격으로만 고정되지 않습니다.
오시리스 신화에서는 살해자, 찬탈자,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로 등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라의 태양선을 지키는 수호자로도 나타납니다.
이 모순이 세트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세트는 깨끗하게 선한 신도 아니고, 단순히 악한 신도 아닙니다.
그는 경계에 있습니다.
사막과 경작지의 경계.
질서와 혼돈의 경계.
외부와 내부의 경계.
파괴와 보호의 경계.
#6.
그래서 세트 작업은 편안한 위안보다는, 내가 서 있는 경계를 보게 만드는 쪽에 가깝습니다.
내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무엇을 더는 끌고 갈 수 없는지.
무엇을 잘라내야 하는지.
무엇을 터뜨려야 오히려 살아나는지.
세트는 그걸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펩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아펩은 그저 “나쁜 뱀” 정도로만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아펩은 매일 밤 다시 나타나는 혼돈입니다.
한 번 찔렀다고 영원히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밤이 오면 다시 올라옵니다.
무기력도 그렇습니다.
회피도 그렇습니다.
자기파괴도 그렇습니다.
흐릿한 도피도 그렇습니다.
한 번 정리했다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태양선은 매일 밤 항해해야 하고,
세트는 다시 앞에 서야 합니다.
이 상징이 저는 꽤 현실적이라고 느낍니다.
우리 삶에서도 혼돈은 한 번에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는 매번 그것을 알아차리고, 이름 붙이고, 찌르고, 지나가야 합니다.
세트 작업은 바로 그 감각과 닮아 있습니다.
“나는 이제 완전히 괜찮아졌다”가 아니라,
“오늘 밤에도 올라온 아펩을 본다.”
“그리고 나는 다시 태양선을 지킨다.”
이쪽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세트와 작업할 때 중요한 것은, 이 신격을 단순히 “강한 존재”로 소비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강한 신격을 부른다고 내가 자동으로 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강한 이름을 입에 올린다고 내 현실이 갑자기 정리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강한 신격과 작업할수록 더 필요한 것은 기본입니다.
기록하기.
정화하기.
그라운딩하기.
#8.
특히 세트 같은 존재와 작업할 때는 “내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도 중요하지만,
“내가 지금 무엇을 피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세트는 혼돈을 예쁘게 포장해주지 않습니다.
무너진 것을 무너진 대로 보여줍니다.
터져야 할 것을 터지게 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 남는 것을 보게 합니다.
생존력.
뼈대.
의지.
그리고 내가 생각보다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는 감각.
그래서 개인적으로 세트와 작업한다는 것은, 단순히 멋있는 사막의 신과 교류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내 안의 흐릿한 것들, 질척한 것들, 계속 도망치고 싶은 것들을 사막 한가운데로 끌고 나오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세트를 같은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신격 작업은 개인의 성향, 상태, 신앙관, 작업 방식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다만 제 경험 안에서 세트는 부드러운 위로자가 아니라,
위험한 길에서 정신줄 놓지 않게 하는 보호자에 가까웠습니다.
친절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강합니다.
상냥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믿을 만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트는 사람에게 묻는 것 같습니다.
너는 정말 네 길을 갈 생각이 있는가?
그렇다면 사막에서도 걸을 수 있는가?
저는 세트 작업을 그렇게 느꼈습니다.
#9.
붉은 사막은 다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 다정하지 않음이 사람을 살립니다.
불필요한 환상을 말려버리고,
도망칠 구멍을 없애고,
곪은 것을 터뜨리고,
결국 자기 두 발로 서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트와 작업할 때 필요한 것은 멋있는 말이나 과한 몰입이 아니라,
생각보다 아주 기본적인 것들입니다.
기록할 것.
정화할 것.
현실을 챙길 것.
내가 무엇을 피하고 있는지 볼 것.
그리고 사막 한가운데서도,
내가 아직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것.
[참고로 함께 보면 좋은 자료]
Encyclopaedia Britannica, “Seth”
Encyclopaedia Britannica, “Apopis”
British Museum, “Ancient Egyptian gods and goddesses”
Magda Gad, “Seth Against Apophis: Originating The Scene Depicting Seth Spearing Apophis”
Pyramid Texts, Coffin Texts, Book of the Dead, Amduat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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